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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 완전 성화가 가능하다.
- 이 전에 글들을 통해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성경적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도 설명하였다.
(노아, 다윗, 세례요한의 부모님들등)
오늘도 더 살펴보자.
2. 오늘도 여전히 영상을 보고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더한 내용이다.
(영상 내용 = 90%, 내 생각 = 10%)
우선 본문은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자는 성숙한 자를 의미한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온전한 자 혹은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우리라는 단어를 교회 혹은 전체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견해다.
고린도전서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이 우리라는 단어는 문맥에 의해서 다양하게 쓰인다.
어떤 때는 사도들만을 지칭할 때도 있고, 다른 때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마지막으로 교회 전체를 뜻할 때도 있다.
그냥 교회, 혹은 전체 성도들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억지스럽다.
문맥을 통해 우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정리 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 우리 = 사도들(바울 포함)
- 우리 =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 우리 = 교회 전체
1. 우선 6절에 나오는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고전 2:9-10절, 12절도 사도들에 관한 것이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절에 나오는 우리도 사도들에 관한 것이다.
왜 그런지를 살펴보자.
우선 13절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노니에서 표현한 말하노니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
말하노니 = 가르치는 것들.
즉 바울이 주장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12절부터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가르침을 가르쳤다(말하노니)고 말한다.
즉 사도들이 성령님께 배운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3.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육에 속한 자는 불신자를 말한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바울은 사람을 셋으로 나눈다.
- 육에 속한 자 = 불신자
- 육신에 속한 자 =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
- 신령한 자 = 바울 및 사도들
그런데 문제는 학자들이 사람을 둘로 해석하기에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 육신에 속한 자 =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
- 신령한 자 = 바울 및 사도들
위 고전 2:14-15도 사람을 셋으로 구분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즉 육에 속한자를 불신자로 해석해야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육신에 속한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로 해석하면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우선 15절에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고 했다.
즉 바울 및 사도들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아무에게도는 불신자를 의미한다.
14절에 육에 속한자 불신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15절 아무에게도도 육에 속한자다.
즉 바울은 불신자에게 판단받지 않는다.
무엇을 판단받지 않느냐고 하면, 13절의 바울의 가르침을 판단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육에 속한 불신자들에게 판단받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당시 불신자들(헬라인들, 헬라철학자들, 유대 서기관들)이 바울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울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자격이 없었다.
이유는 바울의 가르침이 성령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부터 왔기에, 육에 있는 자들이 이들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따.
이들이 바울을 판단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우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도 같은 가르침을 받아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즉,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온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바울을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 당시,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은 성령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가르쳤다.
성령님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알고 계셨다.
마음 깊숙이 있는 복음과 복음에 관한 지혜들을 사도들에게 전하였고, 사도들은 이것을 성도들에게 전하였다.
이들의 가르침을 비난하려면, 적어도 자신도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그렇치 않으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이 이들을 판단할수도 없었다.
그리고 성령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당연히 16절의 말씀처럼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은 자신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기에.
4. 반론들 :
4-1) 그렇다면, 반론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고린도전서 여러 곳에서 다르게 쓰였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가 교회라고 쓰였다.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바울과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니 많은 학자들이 고전 2장에 나오는 우리는 교회 혹은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위에 설명하였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3가지로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떻게 쓰인지는 문맥을 봐야 알 수 있다고 미리 언급하였다.
내가 글을 쓰더라도, 우리라는 단어를 서두, 중반, 말미에서 다르게 쓸 수 있다.
서두에서는 나와 친구, 중반에서는 나와 회사원들, 말미에서는 나와 가족등으로 쓸 수 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문맥을 통해서이다.
성경도 같다.
문맥으로 우리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4-2) 고전 2:15절에 신령한 자가 나온다.
여기서 신령한 자는 남성 주격 단수다.
그러니 한명을 의미한다. (바울)
3:1에서는 신령한 자들, 즉 복수로 표현되었다.
여러 온전한 자들을 의미한다.
(원어로 그렇게 쓰여있음)
이런 것들이 온전을 이해하는데 방해하는 요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