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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기독교에는 완전(온전)해 질 수 있다고 보는 해석완전해 질 수 없다는 해석두 가지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대부분 완전(온전)해 질 수 없다는 해석을 지닌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해석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 :

고전 2:6절에 나오는 지혜의 의미를 예수님(혹은 복음)이라고 본다.

고전 1장, 고전 2:6-8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but 지혜는 복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는 그리스도와 복음이 맞다.

위에서 언급한 고전 1장, 2장을 보면 그리스도, 복음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복음,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전 14:19-20절을 보면 지혜깨닭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혜수준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 지혜에 장성할 수 있다.

지혜장성한 것어린 아이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가 만약 복음이라면, 왜 다시 전하는가?

2:6, 2:13절을 보면,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지혜를 말한다, 가르친다고 되어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를 말하고, 가르친다고 되어 있다.

지혜가 복음이라면, 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말하겠는가?

왜 다시 복음을 가르치겠는가?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다.

즉 여기서 나오는 지혜는, 심오한 진리를 전했다는 말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복음의 진리, 말씀들의 깊은 진리들을 전했다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이 낮았기에, 성령님이 주시는 심오한 복음에 대한 진리들을 가르쳤다.

-지난 시간에 신령한 자들은 온전한 자들이라고 말씀 드렸다.

(고전 2:15절을 통해)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많은 학자들은 신령한 자들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교회 모든 성도들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2절 뒤에 나오는 고전 3:1을 해석하지 못한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1절을 보면 바울은 신령한 자와 너희를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령한 자와 너희와는 다른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2:15절의 신령한 자와 3:1절의 신령한 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2절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

성경의 장과 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성경이 쓰여지고, 그 이후로도 한참 후에 나뉘어 진 것이다.

성경이 쓰여졌을 때는 성경의 장과 절이 없었다.

그런데 2절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곳에서의 신령한 자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억지 같다.

-성경에서 온전, 혹은 신령한 자들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너희는 완전(온전)해라, 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온전은 완전을 뜻한다.

여기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온전은 완전을 뜻한다.

(엡 4:13, 빌 3:15, 골 1:28 등)

신자를 봐도 그렇다.

신자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믿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가??????

-어떤 학자들은 온전(완전)은 다른 성도들보다 성숙한 상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표현하냐고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온전(완전)해 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완전)해 질 수 없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완전)해 지라고 명령하셨는가!!!!!

완전해 질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 맞지 않을까?

성경에서 노아는 완전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술 취해서 골아 떨어진 것으로 완전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과 다를 수 있다.

한 번의 실수가 과연 완전을 가릴 수 있을까?

인생의 한번의 실수로 인해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고 보는 시선이 맞을까?

다윗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했다.

그럼 밧세바 남편을 죽인 사건은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밧세바 사건 외에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라고 표현한다.

즉, 온전하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엘은?

수 많은 선지자들은?

요셉은? 아브라함은?

-온전(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으면 신앙 생활을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더 다다를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자신을 바꾸어 간다.

완전해 질 수 없다고 믿으면, 어짜피 이룰 수 없는거 쉽게 포기하게 된다.

누구도 완전해 지지 않았다며, 자신을 위로한다.

예수님 앞에서 완전해 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과연 어느 것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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